[투비스 구미라 기자] 헤어디자이너로 출발해 세계적인 패션디렉터이자 뷰티디렉터. 무대 위의 악마, 군기반장, 악마와 천사의 양면성, 모델계의 대부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그. 오민아트팀 구성원은 대략 150여명으로 국내외 콜렉션을 비롯 일년에 40개 이상의 쇼를 커버한다고 한다. 그는 최근 성황리에 종료된 헤라 서울 패션위크의 총 디렉터를 맡아 한달 동안 85개의 패션쇼를 소화했다.
오민원장을 최근 이태원의 한 까페에서 만났다. 그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디렉터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솔직하고 인간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패션에 관한 이야기와 일상이 더욱 궁금해졌다.
#오민과 작품선택 그리고 닉네임에 대하여
“일년에 많이 할 때는 300개 이상이 되기도 하죠. 구성원이 역할 분담을 해서 헤어, 메이크업 디렉터팀이 콘셉트 파일작업, 소품, 스타일링, 시연날짜, 피팅, 리허설 날짜 등을 일사불란하게 준비해요.”
“(웃음) 글쎄요. 제가 좀 무섭나봐요. 한번은 제가 의자를 집어 던지며 쌍욕을 한적도 있죠. 리허설시간을 이미 배정해줬는데 15분 남겨 놓고 모델들에게 무대리허설을 당연한듯 요청한 거죠. 자기파트가 아니라 전체무대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와 생각이 아쉽습니다.”
#런던시내의 유서깊은 박물관을 물들인 단청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쇼를 물어보니 2002년 월드컵 전야제와 2012년 런던올림픽 이상봉 개막식 축하쇼라고 이야기한다. 단청에 기와를 씌운 것이 뷰티라 박물관에 영구 기증되기도 했다.
“단청을 하기 위해 별별 시도를 다해봤어요. 한지를 꼬아서 가발도 만들어보고, 합죽선과 고추모양의 노리개를 달아보기도 하고 한국적인 게 뭘까 끝없이 고민했어요. 그러던 중 롯데 월드 민속박물관에서 담벼락에 부딪혀서 아팠던 기억이 났어요. 그리고 여주 이천에 있는 그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서 단청을 입혀 고무밴드로 모델 머리에 얹었죠.”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희열을
그는 매 쇼의 결과물보다 처음 그 쇼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 하나 하나를, 고민해가는 여정을 사랑하고 즐기는 듯 보였다. 오민 원장에게서는 아이와 같은 해맑은 열정과 미용인에 대한 사랑이 물씬 묻어났다.
“고민스럽지만 찾아내고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할 때.. 헤어,메이크업이 맞아 떨어졌을 때 정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껴요, 박윤수 빅박쇼는 자작나무 프린트를 갖고 했어요. 머리를 꼬불하게 했다가 살짝 풀리니까 너무 좋은 거에요.하하"
“한편의 성공드라마로 인정받는 것은 감회가 남달라요.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디자이너들이 우리 팀을 존중해준다는 거에요.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자료를 건네주기만 하면 프렌차이즈급 100-200개 살롱이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일을 해요.”
오민원장은 메머드급 프렌차이즈가 트렌드를 알아야 하고 제공해줘야 하는데 패션쇼에 무료로 한번 서주고 트렌드에 앞서고 있다고 광고하는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한데 당연하지 않은 거죠. 하꼬방에서 일해도 정당한 개런티를 받고 일하는 풍토가 아쉬워요.”
그는 누구보다도 미용인들의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깃발을 들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추구할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미용만 했으면 이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디자인을 보내주면 그 옷을 보고 이런 쇼를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일은 정말 즐거워요.”
그는 1년을 주기로 보면 S/S, FW 3월과 10월을 제외하고 현재 중국드라마 뷰티 디렉터 및 상품개발 MD로 중국 상해si티브이에서 한국의 ‘겟잇뷰티’같은 프로그램인 ‘시상가인’ 의 패널과 총괄뷰티디렉터를 맡고 있다.
이외에 한국 웹드라마 작업, 울산 ‘암각화’ 연극 공연,‘워낭소리’ 워낭소리 그후 아트북 촬영에 디렉터로 참여했다. 이런 그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물으니 '가족'이라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49살에 19살 나이차 신부와 결혼해 7살 딸 4살난 아들을 두고 있는 오민원장. 그가 일궈낸 가정이라는 공간이 또 다른 비상의 발판이 돼 더욱 아름답게 진일보할 그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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