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앉아 작업을 하다보면, 도란도란 들려오는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질 때가 종종 있다. 이야기의 시작도 일상스러운 '더 테이블'은 한 카페를 찾은 네 여자의 관계와 공감을 그린 영화다. 사람은 저마다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카페 테이블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한 사람의 우주를 들여다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화만 주고 받을 뿐인데 '더 테이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한적한 골목길, '고전 의상실' 옆에 자리한 한 카페. 조그마한 카페 안 창가 테이블에는 유리컵 위에 꽃이 담겨있다. 그리고 카페 주인이 테이블을 닦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오전, 큼지막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여배우 유진(정유미)이 들어온다. 유진은 현재 스타로 전 남자친구 창석(정준원)을 기다리고 있다. 어렸을 때 만나 교제했던 둘은 이제 서로가 너무 다른 환경에 놓인 남녀가 됐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는 곳이 다르다. 유진은 창석과의 소소한 옛 추억을 나누고 싶지만 창석은 증권가 찌라시를 캐내기 바쁘다.
창석이 이렇게나 진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유진은 마주 앉아있는 지금이 불편하다. 심지어 여자친구였단 걸 증명할 수 있는 인증샷을 찍자고 하는가 하면, 창가 너머에는 창석의 동료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다.
유진의 전사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배우 일에 치여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창석을 만나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지인이 아닌, 여배우 유진으로 보고 있는 창석에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렇게 눈치 없다는게 참 새삼스럽다"고.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창석은 짧은 만남에 아쉬워한다. 그 때 유진 역시 "나도 아쉽다"고 말하는데, 이 아쉽다는 말은 창석이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결을 의미한다.
테이블은 치워지고 이번에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와 커피 두 잔이 놓여있다.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가 어색하게 앉아있다. 경진이 가방 안에서 민호의 시계를 꺼내어 주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같이 하룻 밤을 보낸 사이. 그리고 민호는 인도와 유럽 여행 이야기를 꺼낸다. 경진은 호감을 느끼고 있던 민호가 여행을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리고 네 달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아 단단히 화가 났다.
이야기의 본질을 빙빙 돌기만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만 오가자, 경진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 경진을 잡아 민호는 시계, 카메라 등 여행 중에 샀던 선물을 건넨다. "볼 때마다 사고싶어 가지고". 이 말은 여행 내내 경진을 생각했다는 뜻을 것이다. 꼬여버린 경진의 마음과 서툰 민호가 타래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네가지 에피소드 중 가장 풋풋하고 기분을 좋아지게 만든다.
오후, 세 번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사기결혼모의를 위해 만난 은희(한예리)와 숙희(김혜옥)다. 은희는 사무적으로 숙희에게 상견례 할 때 필요한 정보들을 공유한다. 숙희는 은희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신분 세탁을 하고 결혼을 하려는 줄 알지만, 사실 숙희는 사장을 꼬시려다가 막내 직원과 눈이 맞았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다가가 진실을 풀어놓을 타이밍을 결국 찾지 못한 은희다.
사기 작당을 모인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아픔, 진심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등 많은 여배우들 중 가운데 김혜옥 캐스팅이 가장 기뻤다고 전한 바 있다. 보고 있자면 김종관 감독이 왜 그토록 김혜옥의 캐스팅을 원한건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숙희가 은희의 별명이 '거북이'란 말에 "우리 거북이는.."이라며 진짜 엄마가 딸의 결혼을 앞둔 심정을 이야기 하는데 이 장면이 '더 테이블'의 가장 아름답고, 울컥하는 장면으로 추천하고 싶다.
비가 내리는 밤, 카페의 마지막 손님은 혜경(임수정)과 운철(연우진)이다. 혜경을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전 연인 운철을 만난다. 혜경은 운철에게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할게", "나 다시 돌아갈까" 등 대놓고 운철에게 바람을 피우자고 제안한다. 운철은 거절을 하지만 그가 찰나의 고민을 하는 것을 혜경이라면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아니, 당연히 흔들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던진 제안들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운철이 선택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혜경이 승기를 잡고 있다. 결혼을 선택한 혜경에게 운철은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책임을 피하지만, 혜경은 "난 선택한 적 없다. 내몰렸다"고 반론한다. 영화가 끝나갈 때쯤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는 혜경이 쥐고 흔들었음을 알 수 있다. 급기야 결국 운철이 마음 속 진심을 털어놓지만 혜경은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서 남자친구 차로 돌아간다.
네 여배우가 차례로 지나가는 동안 김종관 감독은 각각 다른 앵글로 촬영했다.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는다. 대형 블록버스터가 아닌, 그냥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대본으로 최고의 여배우들을 모을 수 있었는지, '더 테이블'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결국 이야기고, 공감이고, 위로다. 마음이 머물다 간 '더 테이블', 가을이 진한 여운을 즐기는데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관람한다면 금상첨화다.
[편집:류이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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