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비스 구미라 기자]
프로페셔널한 열정과 책임감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남자가 미용을 하는 것이 0.0001%도 없던 희귀한 시절, 소주를 마시고 미용수업에 들어갈 정도로 숫기가 없던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패션디렉터이자, 뷰티디렉터가 됐을까. 드라마 같이 펼쳐진 그의 인생스토리에 귀 기울여봤다.
#오민의 인생스토리
오민원장의 지금 현재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 처음 이 분야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알아야만 했다. 음악에 심취해서 고등학교 때 4인조 그룹을 만들었고 대학은 포기 해 공부는 뒷전 인 채 음악 할 장비를 사기위해 분식집을 운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미용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게 됐다. 그 사소한 제의가 오민원장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당시 미용사가 될 거라고 생각은 못했어요. 그저 돈을 벌어 앰프를 사고 싶었죠. 그러다가 분식점이 망했고, 당시 분식점을 찾았던 원장님과 사촌누나에 강권에 미용학원에 등록하게 됐어요.”
당시 그는 300명 중 유일한 청일점으로 버스 안내양이 없어지면서 미용 쪽으로 몰려든 거친 여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해야했다. 전숙제 선생님이 수업시간마다 지키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온전히 끝마칠 수 없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고급반의 미용학원 강사로 오셨던 청량리 롯데 대왕코너쇼핑몰안 원장님의 미용실에서 일을 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여자 산부인과 의사를 선호하듯 남자 미용사라면 질색하던 시절이라 결국 손님들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해 쉽지 않은 출발을 했다.
#우연히 만난 패션, 패션
운명은 예상치 못하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다. 이후 오민원장은 명동에 의자3개, 샴푸실도 없어 대야에 헹궈주는 간이 미용실에서 일했다. 그리고 명동의 에덴미용실에서 2년 일하던 중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정동MBC건물에서 중앙디자인협회 앙드레김, 이상봉, 박윤수의 패션쇼의 백스테이지 현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관계자도 아닌데 백스테이지에서 여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패션쇼 리허설을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머리가 쭈뼛쭈뼛서는 마법같은 시간을 경험했어요. 무대에 깔린 음악이 잊고 있던 감성을 깨웠던 것 같기도 하고요.”
#스토커의 오명을 벗었던 일화
다시 명동으로 일터를 잡은 오민원장은 그때부터 에덴미용실에서 만난 미용스태프가 ‘논노’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알음알음 패션쇼장을 찾기 시작했다.
힐튼호텔에서 패션쇼를 많이 한 시절이었는데 정동 mbc 패션쇼장에서 오민원장과 마주친 친구가 오민원장을 ‘스토커’로 오해한 웃지 못할 해프닝과 마주한다.
“고참 모델이 나와서 어린 모델이 무서워하니, 찾아오지 말아달란 이야기도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나는 미용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죠.”
이런 오민원장에게 패션에 대한 불일 듯 일어나는 갈구와 스토커에 대한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문화체육관 정동 MBC 패션쇼 근처에 신문지를 깔고 가위, 드라이기, 스프레이 빗 몇 개를 깔았다. 마침 뒤늦게 택시를 타고 내리는 모델이 업스타일을 한 머리가 걸려 풀어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오민원장에게 기회가 찾아 온 것.
“리허설이 엉망진창이 되자 스태프가 빗 몇 개만 빌려 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제가 잠깐 고쳐주겠다고 한 것이 패션쇼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지금은 최고의 아티스트, 세계적인 패션디렉터라고 불리는 그에게는 이런 우여곡절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근성이 있었다. 행여 꿈을 포기하고 싶은 청년들이 있다면 위로와 도전이 되는 일화였다.
#그레이스리 원장과의 만남
오민원장은 그 이후부터 모델센터일은 다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말그대로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당시 병역이 나왔고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물난리로 북한의 원조를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시절. 그만둘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그를 예의주시해 보고 있던 예림미용학원원장님이 그레이스리 살롱을 소개시켜줘 다시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 그레이스리 살롱은 원장이 현대미용의 세계 3인이라 불리는 폴미첼에게 사사받은 분이었죠. 고객들도 이건희 회장부인, 한국일보 사장 장명수, 이건희 회장 어머니, 패티김 등 정재계재벌들과 유명연예인들이 오는 곳이었어요.”
비달사순, 알렉산더,와 더불어 폴미첼에게 사사받은 그레이스리 원장밑에서 3년을 버텨 디자이너로 일하고는 다시 명동으로 나왔다는 오민원장은 새로 지은 건물에 화단에 꽃을 심고 애 키우듯이 키웠던 일화도 털어놨다.
“당시 동숭동에 새로 건물을 짓고 담쟁이를 캐 꽃을 심고 있는데 지금의 이철 헤어커커 대표인 이철씨가 뭐 하냐고 물었던게 기억이 나네요. (웃음) 유직렬, 예림미용학원 원장님의 소개로 갔기에 그 분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아 디자인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열심히 일했어요.”
오민원장은 그레이스리 살롱에서 딱 3년만에 디자이너를 달고 나왔다. 상위 1%만 오는 미용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패션쇼에 대한 미련이 그를 동숭동에만 머물게 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강남의 헤어뱅크라는 곳에서 딱 1년 만에 매출톱을 이루며, 당시에는 유명했던 김창숙 부띠끄의 패션쇼를 진행했다. 다시 모델들을 만나보니 꼬맹이들이 최고의 모델들이 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 중 한명이 마약사건에 연류 돼 문을 닫는 사건과 뜻하지 마주하게 된다.
“잘 나가던 미용실이 문을 닫게 되자 막막했어요. 그렇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바로 엔터회사에서 기획, 연출을 담당했었는데 마침 모델라인 이재현 회장에게 연락이 와 그때부터 쇼라는 걸 제대로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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